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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수묵 누드’ 창조한 여든넷의 소녀
화선지에 쏟아 부은 무아지경 에너지로 영혼의 드로잉
 
정윤희 기사입력  2015/01/30 [09:33]


▲ 소원 문은희 화백     © 시사뉴스메이커
여성이 자신의 꿈을 좇아 산다는 것. 여전히 사회에는 이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분위기가 남아있다. 자아실현이 아닌 사회에서 한정한 여성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여자 인생 전반에 걸쳐 작용한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70년 전에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나의 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으리라. 그 당시 ‘자아’에 초점을 두고 사는 여성이 있었다면 사회, 가정, 시댁에서 ‘죄인’ 취급 받는 분위기를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문은희 화백은 70년 그림 인생에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문 화백의 그러한 억눌림이 폭발하는 선이 되어 화선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그의 영혼을 표현해 낸다.  

“미대 보내주는 남자와 결혼하겠다”

세계 유일의 ‘수묵 누드’로 일본 미술계를 뜨겁게 달궜던 문은희 화백을 충주에 있는 그의화실에서 만났다. 여든넷 하얀 머리 할머니인 문은희 화백이지만 그에게 풍기는 에너지는 그림에 대한 열정에 이끌려 무작정 그림 선생을 찾아갔던 열일곱 소녀 그대로였다. 문 화백이 들려준 그의 그림 인생 이야기는 그보다 40여년 어린 기자의 심장도 도전으로 채워줬다.

1948년,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여고생 문은희는 그림에 대한 이유 모를 열병을 앓았다. 하루종일 전차를 타고 헤매며 신문에서 본 남관미술연구소 남관선생을 찾아갔다. 이 당돌한 소녀는 그 곳의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지금처럼 남녀가 자연스레 웃고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남학생들과 내외하느라 종일 고개를 못 돌리고 그림을 그리느라 항상 목이 뻐근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그렇게 소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여느 집처럼 그의 부모님은 딸에게 혼인을 재촉했다. 문 화백은 당시 부모님께 “미술대학에 보내주는 남자에게 시집가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상 그림과 결혼하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남자가 있었다. 한양대학교 공대 교수를 지낸 故 황의철 박사는 문 화백의 남편이 됐다. 문 화백은 만삭의 몸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입시를 치르고 합격해 동양화과의 유일한 여학생, 그것도 애 엄마 여학생이었다.

“살림을 차리고 난 후에 시댁에서도 주변에서도 설마 진짜 미대를 갈까 했지만 난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된다. 친정서 마련해 준 홍대 근처 집에서 애들을 키우며 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에 여자가 아이를 키우며 대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아들의 기저귀를 빨아 널고 나서 우는 아이를 두고 집을 나서는 그의 마음도 아팠다. 외부 실기 수업이 있을 때면 동료들이 아들을 돌아가면서 업어주곤 했다. 둘째 아들이 생겼고, 문 화백이 대학교 2학년 때 남편은 미국 유학을 떠났다. 혼자 남아 아들들을 키우며 남편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던 그였지만 그림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문 화백은 1959년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이 8년 유학 후 돌아 왔지만 공부에만 집중했고 문 화백은 가난 속에서 육아의 짐을 짊어져야 했다. 셋째 딸이 생겼고, 빚은 늘어만 갔다. 남편이 대학 강사로 버는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가기란 힘들었기 때문이다. 10년간 문 화백은 붓을 들 수 없었고 고혹의 나이로 향했다.  

폭발한 억눌림, 일본 땅 흔들다

셋째 딸을 낳은 서른아홉부터 문 화백은 눌러왔던 자아가 뜨겁게 꿈틀거림을 견딜 수 없었다. 마침 살림살이도 좀 나아지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려야 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생명이요, 삶이기 때문이다.”

▲     ©
폭발한 억눌림은 성난 파도가 되어 화폭에 옮겨졌다. 1백호짜리 그림 20점을 단숨에 쏟아냈다. 당시 그의 주요 소재인 파도는 그의 내면 풍경이었다. 대학 때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와 1만원지폐의 세종대왕 초상을 도안한 운보 김기창에게 배웠던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산과 들, 성난 파도를 거침없이 화폭에 담았고 1975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내라는 신분은 문 화백이 원 없이 꿈을 펼치기엔 여전히 족쇄가 됐다.

붓을 다시 잡은 지 10년이 흐른 마흔아홉살이 되던 해에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남편과 헤어졌다. 남편은 문 화백이 그림을 그만 두길 원했지만 문 화백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들도 장성하고 출가했기에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혼자가 되자 외로움과 비참함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문 화백은 오랜 세월 가난과 벌인 치열한 싸움 끝에 벌거숭이처럼 내던져진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길을 누드에서 찾기로 했다. 문 화백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인 수묵 누드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다시 열일곱 소녀로,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피나는 단련으로 세계 최초의 수묵 누드화를 꽃 피웠다.

문 화백 작품 중 백미는 34m에 이르는 연작 누드 작품이다. 청주예술의 전당 갤러리에서도 전시된 적이 있는 이 작품은 수십 명의 여인의 누드가 수묵 드로잉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독보적인 걸작이다. 신들린 듯 그려냈다.

“어떻게 그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신이 그려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면 그림에 절을 한다. 객체와 주체,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깨어진 무아지경에서 저절로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문 화백의 작품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스승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생전에 운보 선생은 문 화백의 작품을 보고 “붓으로 드로잉을 표현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라며 “예술이란 스스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구는 것이며 이 세계만큼은 문은희가 최고야!”라며 칭찬해주었다.  

지난 1987년 문 화백은 조선호텔 화랑에서 세계 최초의 수묵 누드 크로키 전시회를 열었지만 국내 반응은 미지근했다. 하지만 뜻밖에 일본 화단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문 화백의 수묵 누드화집을 본 일본 화가 겸 동경전 회장인 우사미 쇼오고가 일본 4대 미술전인 동경전 참여를 제안했다. 여기에 문 화백은 작품 12점을 내걸었고 이듬해 14회 동경전에도 작품을 선보였다. 평론가들의 극찬이 이어졌다.

미술평론가 와시오 도시히코는 문 화백의 그림에 대해 “모필로 그리는 묵의 농담과 윤갈의 선에는 화가의 기량과 인간성의 모드가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보신적인 화가라면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라고 호평한 바 있다.  

“여한 없다…죽을 때 까지 그림 그릴 것”

문 화백은 1989년 일본 스트라이프 하우스 미술관에서 개인기획전을 열었고 아사히 TV 등 일본 매체에 크게 소개되는가 하면 미술전문출판사인 이와사키는 한국작가의 작품집으로는 유일한 ‘누드백태(百態)’를 냈다. 일본 브리태니카 국제연감 미술부문에는 피카소, 칸딘스키와 함께 문 화백이 세계 작가 5명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였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나는 나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에서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그 때 일본 일정이 너무 고되어 이가 빠질 정도였지만 긴 세월 노력 끝에 이뤄낸 성과였기 때문에 기뻤다.” 

문 화백은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난 1994년 불교학자이자 미술평론가 김구산(83) 선생이 살고 있는 충주시 동량면 충주호 근처로 내려왔다. 당시 남편도 충주로 내려와 재결합했지만 이듬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 화백은 다시 3년간 다시 붓을 놓았다.

요즘 문 화백은 충주 화암화실에서 또 다시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그림을 나누기 위한 판화 제작도 그의 작은 소망이다. 그림만 그리고 싶어 교수 제안도 두 번이나 마다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 2001년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회고전을 한 번 한 이후로 충주 지역에서 전시를 해본 적이 없다. 전시할 공간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충주시의 관심도 잠시 뿐이었다.

현재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뮤지엄 산에서 문 화백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뮤지엄 산은 오는 3월 1일까지 ‘사유로서의 형식 - 드로잉의 재발견 전(展)’을 통해 문 화백의 작품을 전시한다.

“누드를 20여년 그리다보니 응어리가 모두 풀렸고 이젠 아무 여한도 없다. 다만 어디선가 지원을 해준다면 쌓여 있는 그림을 걸어놓을 만한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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